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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14. 14世 〉28. <부정공>학생공휘진구묘갈명(學生公諱晋耈墓碣銘)
1. 문헌 목록 〉14. 14世 〉30. <부정공>충의사휘진로봉안문(忠義士諱晋老奉安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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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부정공>증통훈대부행예빈시별제공휘진로묘갈명(贈通訓大夫行禮賓寺別提公諱晋老墓碣銘)
贈通訓大夫行禮賓寺別提公諱晋老墓碣銘 公諱晋老字台卿姓趙氏貫玉川以高麗侍中諱璋爲上祖而四傳諱元吉號農隱諡忠獻封玉川府院君享武夷祠再傳諱瑜麗命之革與杜門諸賢守罔僕義享謙川祠其子諱崇文號竹村 端宗遜位與六臣同殉配謙川祠其子諱哲山號龜川從父而殉父子併配子莊陵廟即公七世也曾祖諱潤璉受業于朴訥齋以學行際講藝院習讀祖諱儼禮賓寺參奉壬辰亂與再從弟都事侃多翠兵糧赴趙重峰幕錄宣武原勳考諱元律號守愚堂行義禁府都事以孝著世妣珍原朴氏宣務郎樑宙女生公于五山本第器宇魁傑志氣慷慨嘗有言曰男兒生世以飽食煖衣爲業不過乎衣蟫食蠹以蔭贈通訓大夫行禮賓寺別提光海壬子與呉定邦洪宇定抗疏極諫出謫天安 仁祖改玉始得宥還丙子亂以副元帥柳公琳之薦爲三道軍管即赴統營率兵數千馳赴南漢山城道聞和議之成痛哭罷旅而歸子鄉第乎書崇禎日月四字揭于壁靜坐一室左右圖書每夜月明讀伯夷列傳及前後出師表聲朗朗可聽居人號之以出師表先生 孝宗己亥二月六日卒葬于雙岩面支擧洞乾原配木川張氏九功女墓祔系子琯文藝志行爲世推重娶于海州呉以震女孫男耘畹娶于海州呉挺海女曾玄不錄噫公墓舊有碑短小無儀字且泐不可讀今欲改之十二世孫燕翼抄公行錄與其族東潤來求顯刻之辭據而爲之銘曰 磊落其志軒豁其度視人飽煖如蟫如蠹昏朝被謫直言見忤統營出軍南漢直赴孰謂和成憤哭中路壁揭崇禎示其思慕夜讀伯夷此心可寓世稱先生非以老故後人景仰具珉于墓於千百年陵谷何懼 檀君紀元四千三百二十年 丁卯夏至節 坡平 尹丁鍑 撰 증통훈대부행예빈시별제공휘진로묘갈명(贈通訓大夫行禮賓寺別提公諱晋老墓碣銘) 公의 諱는 진로(晋老)요 字는 태경(台卿)이며 姓은 趙氏요 본관은 옥천이니 고려시중(侍中) 휘 장(璋)을 시조(始祖)로 하고 四傳하여 휘(諱) 원길(元吉)의 호는 농은(農隱)이요 시호는 충헌(忠獻)이며 옥천부원군(玉川府院君)이니 무의사(武夷祠)에 배향(配享)하였고 재전(再傳)하여 휘(諱) 유(瑜)는 고려가 운진(運盡)하매 두문제현(杜門諸賢)과 절개를 지켜 겸천사(謙川祠)에 배향하였으며 그 아드님 숭문(崇文)의 호는 죽촌(竹村)이니 단종(端宗)께서 왕위(王位)를 사양할새 육신(六臣)과 함께 순절(殉節)하셨고 그 아들이신 휘 철산(哲山)의 호는 귀천(龜川)이니 父子同時순절(殉節)하여 장릉묘(莊陵廟)와 겸천사에 배향하였으니 공의 七世祖이시다. 증 조휘는 윤연(潤璉)이니 박눌재(朴訥齋)에게 수업(受業)하여 학행(學行)으로 강례원(講禮院) 습독(習讀)을 제수(除授)하였고 조고휘는 엄(儼)이니 예빈시참봉으로 임진란에 재종제도사(都事)가 간(侃)과 더불어 무기와 군량을 모아 조중봉(趙重峰) 군막에 참전(參戰)하여 선무원훈(宣武原勳)에 기록되였고 고휘 원율(元律)의 호는 수우당(守愚堂)이니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를 역임(歷任)하시고 효행으로 저명하였다. 어머님은 진원(珍原)朴氏 선무랑(宣務郎) 양주(樑宙)의 따님이시다. 인조계유년에 五山본댁에서 公을 낳으니 기우(氣宇)가 괴걸(魁傑)하고 지기가 강개(慷慨)하여 평소에 말씀하기를 남자가 세상에 태어나서 배부르게 먹고 다숩게 입는 것을 직업으로 생각하면 입는 방게와 먹는 버러지에 다를게 무엇인가 하였다. 음관(蔭官)으로 通訓大夫를 증(贈)하였고 예빈시별제(禮賓寺別提)를 역임하셨다. 광해(光海) 임자년에 오정방(呉定邦) 홍우정(洪宇定)과 같이 글을 올려 왕의 실정(失政)을 극간(極諫)하다가 천안에 정배(定配)하였다가 인조(仁祖)께서 국권을 잡음으로 비로소 사면(赦免)되여 丙子胡亂을 당하여 부원수(副元帥) 유림(柳琳)의 추천으로 삼도군관(三道軍管)이 되여 즉시 통영(統營)에 부임하여 數千軍을 거느리고 남한산성에 달려가던 도중에 화해되였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며 군사를 흩어 보내고 고향에 돌아와 친필로 숭정일월(崇禎日月) 네글자를 써서 벽상에 걸고 방안에 고요히 앉아 달밝은 밤이면 백이열전(伯夷列傳)과 제갈양(諸葛亮)의 전후 출사표(出師表)를 읽으니 고을 사람들이 출사표선생이라 불렀다. 효종(孝宗) 己亥 二月六日에 卒하시니 쌍암면 지거동 乾坐原에 장사하였다. 배위(配位)는 木川張氏 구공(九功)의 따님인데 묘소 는 부장(附葬)하였고 계자(系子) 관(琯)은 문예(文藝)와 지행이 世人의 추중(推重)을 받았다. 배위는 해주 오이진(呉以震)의 따님이요 孫男 운완(耘畹)의 배위는 해주 오정해(呉挺海)의 따님이다. 曾玄孫은 기록치 않는다. 아! 公의 묘소에 구비(舊碑)가 있었으나 비체가 短小하여 위의가 없고 글자가 마멸되여 읽을 수 없으므로 十二世孫 燕翼이 公의 행록을 등초하여 그 族人 東潤과 同伴하여 현각(顯刻)의 글을 청함으로 초건을 근거하여 명(銘)하여 가로되, 공명정대한 그 지행이여 磊落其志 높고 넓은 그 도량이로다. 軒豁其度 배부르고 몸따심을 직업으로 아는 사람을 보면 示人飽煖 바퀴벌레나 먹기만 하는 좀벌레같이 여기더라. 如蟫如蠹 포학한 왕조에서 귀양살이하게 됨은 昏朝被謫 충성된 바른 상소로 지적을 받았도다. 直言見忤 통영에서 군사를 정돈하여 統營出軍 남한산성으로 달려가니 南漢直赴 뉘라서 화의가 성립되었다 말하였던고. 孰謂和成 분심을 참지 못하여 도중에서 통곡하셨다. 憤哭中路 숭정년호를 벽에 써 걸어놓고 壁揭崇禎 대명황제를 사모하며 示其思慕 밤마다 백이전을 읽으시니 夜讀伯夷 그 마음을 스스로 위로하셨다. 此心可寓 세상 사람들이 일컫기를 世稱先生 선생은 늙지도 돌아가시지도 않으셨다 한다. 非以老故 뒷사람이 경모하고 추앙하여 後人敬仰 가진 각자로 묘전에 표하노니 具珉于墓 천백년의 세월이 지나간들 於千百年 이 산소가 능이할가 어찌 근심하리. 陵谷何懼 檀君紀元四千三百二十年 丁卯夏至節 坡平 尹丁鍑 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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